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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인류의 시작/장동 신북
- 작성일
- 2019.07.10 10:53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669
백두산이 폭발할지 모른다는 중국 화산학자들의 견해가 최근 국내에 소개되면서 기상청이 대책 마련을 검토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늦어도 신생대 제3기(6500~200만년 전)인 2800만년 전 폭발을 시작한 백두산이 마지막으로 분화한 것이 1903년. 10세기 일어난 백두산 대폭발은 화산재를 1500㎞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까지 날려 보낼 정도다. 10세기 중반의 백두산 폭발은 2010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의 1,000배 수준이었으며,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說이 나올 만큼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4월 아이슬란드 화산폭발에 이어 일본 후지산과 백두산의 폭발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어 유럽 8개국 공항이 폐쇄되고 하루 약 1만 7천여 편의 항공노선이 결항되었는데, 전문가들은 태양을 가린 화산재 구름이 향후 지구의 기후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인류 역사에서 화산 분화는 가까운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지구의 기상이변을 초래해 인류의 경제활동을 저해시켰다.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로마 폼페이를 매몰시켰으며 1783년 분화한 아이슬란드 라키 화산이 일으킨 유럽의 기상이변은 대기근을 초래해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원인이 됐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구석기 시대 인류가 석기로 애용한 흑요석(黑曜石)은 화산 폭발의 산물이었다. 흑요석은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면서 만들어지는 유리질 성분이 많은 ‘검정유리돌이다.수술하는 메스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해서 유리와 비슷하고 가벼운 타격으로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있으며 가공하기 편해 한반도 석기시대 이끈 ‘보물’로 세계 여러 석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동아시아에서 흑요석은 화산 활동이 빈번했던 백두산과 일본 열도 등지에만 분포하는 돌이다.
위대한 문화유산 신북유적을 최초발굴한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교수)이 펴낸 ‘빛나는 호남 10만년’ 특별전 도록을 보면 한반도 남단인 전남 장흥 신북 유적에서도 백두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와 한반도 남해안에서 주로 발견되는 고시다케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발굴되었다 한다. 장흥 신북 유적에서 백두산까지는 직선거리로 800㎞가 넘으며 일본 규슈 고시다케까지의 거리도 족히 400KM넘는 거리다. 빙하기였던 당시 한반도와 일본규슈는 많은 부분이 육지로 연결돼 장흥장동 신북유적은 백두산과 일본 흑요석이 들어오는 한반도의 길목이었지만 한편으로 엄청나게 귀한 돌을 구하기위한 구석기인들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의 구석기 전공자인 암비루 마사오(安蒜政雄) 메이지(明治)대 교수에 따르면 백두산과 일본 홋카이도의 시라다키(白瀧), 혼슈(本州)의 기리카미네(霧ケ峰), 규슈(九州)의 고시다케(腰岳) 등은 동아시아의 4대 흑요석 원산지라 한다.
장흥군의 미래 장흥신북유적 국가사적지정과 박물관건립및 축제시행연구를 위해 공주석장리 박물관에 다녀왔다.마침 흑요석을 통해 본 선사인들의 삶은?이라는 주제로 공주 석장리박물관서 특별전이 열려 한국과 일본 유물 528점 비교 전시중이었다.가장 빛나는 자리에 장흥장동 신북유적 흑요석이 자리하고 전시중 이었다.
공주시는 석장리박물관 흑요석전시를 통해 선사인들의 삶과 네트워크를 알아보는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 흑요석의 길’ 특별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70년 공주 석장리 유적 조사 중 처음 발굴됐으며, 이를 계기로 흑요석이 한국 구석기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돼 왔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흑요석과 연관된 선사인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유물이 비교 전시되고 있다.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임에도 엄마아빠손을 잡고 입장료까지 내가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알림과 동시에 공주시의 品格을 높여나가는 선견지명에 경의와 부러움을 감추기가 무척 힘들었다.
앞서 치고나간 공주석장리,연천전곡박물관과 축제가 지역경제와 지자체의 이미지제고에 한몫,아니 백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들의 위대한 문화유산 장동신북유적이 처한 현실이 더욱 아프게 느껴지게 하는 역사탐방이었다.장흥신북유적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호남인류의 始原이며 왕인 아직기 이전에도 이미 일본열도와의 교류로 선진문화 전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까지 갖고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더나아간다면 물적교류와 함께 일본열도 원주민의 고향이 구석기수도 장흥, 즉 보성강유역 구석기인이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장흥의 밝은 미래지표 안중근해동사,장동신북유적 박물관건립및 축제시행,정경달장군 반계사의 역사문화관광화에 박차를 가해 의향과 청정의 쌍두마차 질주를 기대해 본다.
구석기수도 신북유적발굴터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아이슬란드에서는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어 유럽 8개국 공항이 폐쇄되고 하루 약 1만 7천여 편의 항공노선이 결항되었는데, 전문가들은 태양을 가린 화산재 구름이 향후 지구의 기후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인류 역사에서 화산 분화는 가까운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지구의 기상이변을 초래해 인류의 경제활동을 저해시켰다.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로마 폼페이를 매몰시켰으며 1783년 분화한 아이슬란드 라키 화산이 일으킨 유럽의 기상이변은 대기근을 초래해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원인이 됐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구석기 시대 인류가 석기로 애용한 흑요석(黑曜石)은 화산 폭발의 산물이었다. 흑요석은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면서 만들어지는 유리질 성분이 많은 ‘검정유리돌이다.수술하는 메스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해서 유리와 비슷하고 가벼운 타격으로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있으며 가공하기 편해 한반도 석기시대 이끈 ‘보물’로 세계 여러 석기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동아시아에서 흑요석은 화산 활동이 빈번했던 백두산과 일본 열도 등지에만 분포하는 돌이다.
위대한 문화유산 신북유적을 최초발굴한 조선대 박물관(관장 이기길교수)이 펴낸 ‘빛나는 호남 10만년’ 특별전 도록을 보면 한반도 남단인 전남 장흥 신북 유적에서도 백두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와 한반도 남해안에서 주로 발견되는 고시다케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발굴되었다 한다. 장흥 신북 유적에서 백두산까지는 직선거리로 800㎞가 넘으며 일본 규슈 고시다케까지의 거리도 족히 400KM넘는 거리다. 빙하기였던 당시 한반도와 일본규슈는 많은 부분이 육지로 연결돼 장흥장동 신북유적은 백두산과 일본 흑요석이 들어오는 한반도의 길목이었지만 한편으로 엄청나게 귀한 돌을 구하기위한 구석기인들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일본의 구석기 전공자인 암비루 마사오(安蒜政雄) 메이지(明治)대 교수에 따르면 백두산과 일본 홋카이도의 시라다키(白瀧), 혼슈(本州)의 기리카미네(霧ケ峰), 규슈(九州)의 고시다케(腰岳) 등은 동아시아의 4대 흑요석 원산지라 한다.
장흥군의 미래 장흥신북유적 국가사적지정과 박물관건립및 축제시행연구를 위해 공주석장리 박물관에 다녀왔다.마침 흑요석을 통해 본 선사인들의 삶은?이라는 주제로 공주 석장리박물관서 특별전이 열려 한국과 일본 유물 528점 비교 전시중이었다.가장 빛나는 자리에 장흥장동 신북유적 흑요석이 자리하고 전시중 이었다.
공주시는 석장리박물관 흑요석전시를 통해 선사인들의 삶과 네트워크를 알아보는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 흑요석의 길’ 특별전을 마련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1970년 공주 석장리 유적 조사 중 처음 발굴됐으며, 이를 계기로 흑요석이 한국 구석기 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돼 왔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까지 흑요석과 연관된 선사인들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유물이 비교 전시되고 있다.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임에도 엄마아빠손을 잡고 입장료까지 내가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알림과 동시에 공주시의 品格을 높여나가는 선견지명에 경의와 부러움을 감추기가 무척 힘들었다.
앞서 치고나간 공주석장리,연천전곡박물관과 축제가 지역경제와 지자체의 이미지제고에 한몫,아니 백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들의 위대한 문화유산 장동신북유적이 처한 현실이 더욱 아프게 느껴지게 하는 역사탐방이었다.장흥신북유적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호남인류의 始原이며 왕인 아직기 이전에도 이미 일본열도와의 교류로 선진문화 전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까지 갖고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더나아간다면 물적교류와 함께 일본열도 원주민의 고향이 구석기수도 장흥, 즉 보성강유역 구석기인이었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장흥의 밝은 미래지표 안중근해동사,장동신북유적 박물관건립및 축제시행,정경달장군 반계사의 역사문화관광화에 박차를 가해 의향과 청정의 쌍두마차 질주를 기대해 본다.
구석기수도 신북유적발굴터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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