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 정보 등 개인정보와 민원내용은 민원처리 목적으로만 사용하여야 하며,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제3자에게 제공한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벌금에 처할 수 있습니다.
왜구와 손잡고 민족을 말살한 매국노들
- 작성일
- 2019.03.28 10:55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991
반민특위와 토착왜구가 人口에 膾炙중이다. 해방정국에서 친일매국노들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우리역사의 후유증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분야에서 민족혼을 갉아 먹는 사회적 적폐로 자리하고 있다.2019.3.23일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안중근의사 109주기 추도식이 열렸다.장흥군문화관광과 직원4분과 함께 참석하고 민족혼을 가슴에 불어 넣고 왔다.이자리에 일제학병으로 끌려가 탈출해 6000리길을 걸어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선생의 큰아드님인
장호권선생과 손녀딸을 만나는 영광을 맛보았다.해동사를 설명드렸더니 머지 않아 장흥군 방문을 약속하셨다
안의사 순국109주년과 임정100년을 맞는 2019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고귀한 말씀을 상기하면서
일본을 조국처럼 섬긴 매국노들의 더럽고 추악한 화장술을 고발해 널리 알리려 한다.
**이순신장군'은 없고 '일본장교 박정희'만 있는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박정희<다까끼 마사오>의 친필 현판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순신 가문 종부 며느리의 일침은 "현충사 속 박정희 적폐 없애라"고 일갈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재위시절 이순신의 공적을 기려 현충사에 직접 현판을 사액했지만 현재 현충사에는 숙종이 아닌 박 정희의 친필 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순신 종가는 현판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현충사는 1966년 성역화작업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17만여 평의 현충사가 정작 충무공보다는 일본국장교
박 정희 우상화의 용도로 쓰였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5월광주민중을 학살했던 노태우도 교정작업을 지시했을 만큼 일본식으로 지어져 양식과 의미 모두 변질됐다"며 "성역화작업으로 현충사는 목조건물이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박정희우상화와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5년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조차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의 기념관 같은 곳"이라 발언하기도 했다. 당시 거센 항의로 유 전 청장이 공식사과하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당국에서조차 현충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 독립문에도 이완용의 글씨가 빛난다."독립문 편액은 매국노 이완용 글씨"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분명히 들어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매국노 이완용이 한일 강제병합 이후 엄청난 축재를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에 이완용은 1925년 당시 경성 최대의 현금부호라는 명칭에 걸맞게 최소 300만 원(현시가 약 600억 원) 이상을 소유했다고 했다.
강제병합 때의 이완용 재산은 이른바 은사금(恩賜金)과 하사금, 뇌물, 횡령 등을 합쳐 100만 원(200억 원)이었는데, 이를 굴려서 15년 사이에 3배로 늘렸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팔아먹은 댓가로 받은 돈은 15만 원(30억 원)이라고 했다.
자신의 안위만을 일삼아온 대표적 토착왜구 매국노가 과연 조국독립을 입에 담을수 있는가?
**친일매국노 옹호와 반민특위해산의 당사자 이승만<노덕술,김창용,백선엽등 등용>
해동사는 지난 1955년 장흥읍에 살았던 유림 안홍천(죽산 안씨)이 순흥(順興) 안씨인 안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李承晩)에게 건의해 죽산 안씨 문중에서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해동사의 현판인 `해동명월(海東明月)`은 이승만의 친필이다. 반민특위 강제해산과 친일청산을 포기한 이승만의 화장술이 여기에도
자리한다.이승만의 만행은 다음과 같다. 국민보도연맹사건,한강다리폭파 줄행랑,제주4.3,여순사건,국민방위군사건,3.15부정선거,김구선생암살배후,독립운동자금횡령등 날밤이 지나도 열거할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전체국민의 0.5%에 달하는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학살하였다. 10만 명이면 5·18 광주항쟁 유족규모의 50배에 달하는 규모로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학살의 집약성으로 본다면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능가하며 그 광기로 본다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비할 수 있다. 이토를 처단한 안의사 사당에 매국노들을 등용해서 부정한 권력을 연장하고 자국민을 학살한 이승만의 친필이 자리하고 있음은 왜곡된 우리역사의 한단면으로 장흥군에서도 深思熟考하여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후손들의 책무임을 강조해 본다.
*3월24일 경남 밀양 의열단 김원봉장군 기념관과 진주성을 마눌님,아들과 함께 다녀왔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해서 김구선생보다 한참 많은 최고액현상금을 걸었던 김원봉장군이 남북모두로 부터 잊혀지고 인정 받지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하루빨리 재평가로 그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최고영예의 서훈도 받아야 할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역사기행에서 김시민장군도 충무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이순신장군만 충무공인지 알았던 無知에서 벗어날수있는 기회였다.
비문에는 1000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으로 2만 명의 적을 격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3대첩<행주권율,한산이순신 ,진주김시민>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 똑같이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고 임진왜란 3대첩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보다 덜 알려진 김시민장군, 우리들이 잊지말고 꼭 기억해야할 구국의 영웅이다.지금 이시각 자유를 누리고 우리들이 존재함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왜구들은 부끄런 줄 모르고 오늘도 메뚜기처럼 날뛰는 현실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분야에서 민족혼을 갉아 먹는 사회적 적폐로 자리하고 있다.2019.3.23일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안중근의사 109주기 추도식이 열렸다.장흥군문화관광과 직원4분과 함께 참석하고 민족혼을 가슴에 불어 넣고 왔다.이자리에 일제학병으로 끌려가 탈출해 6000리길을 걸어 광복군에 합류한 장준하선생의 큰아드님인
장호권선생과 손녀딸을 만나는 영광을 맛보았다.해동사를 설명드렸더니 머지 않아 장흥군 방문을 약속하셨다
안의사 순국109주년과 임정100년을 맞는 2019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고귀한 말씀을 상기하면서
일본을 조국처럼 섬긴 매국노들의 더럽고 추악한 화장술을 고발해 널리 알리려 한다.
**이순신장군'은 없고 '일본장교 박정희'만 있는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박정희<다까끼 마사오>의 친필 현판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순신 가문 종부 며느리의 일침은 "현충사 속 박정희 적폐 없애라"고 일갈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재위시절 이순신의 공적을 기려 현충사에 직접 현판을 사액했지만 현재 현충사에는 숙종이 아닌 박 정희의 친필 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순신 종가는 현판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현충사는 1966년 성역화작업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17만여 평의 현충사가 정작 충무공보다는 일본국장교
박 정희 우상화의 용도로 쓰였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5월광주민중을 학살했던 노태우도 교정작업을 지시했을 만큼 일본식으로 지어져 양식과 의미 모두 변질됐다"며 "성역화작업으로 현충사는 목조건물이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박정희우상화와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5년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조차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의 기념관 같은 곳"이라 발언하기도 했다. 당시 거센 항의로 유 전 청장이 공식사과하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당국에서조차 현충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 독립문에도 이완용의 글씨가 빛난다."독립문 편액은 매국노 이완용 글씨"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때마침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분명히 들어 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매국노 이완용이 한일 강제병합 이후 엄청난 축재를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백서에 이완용은 1925년 당시 경성 최대의 현금부호라는 명칭에 걸맞게 최소 300만 원(현시가 약 600억 원) 이상을 소유했다고 했다.
강제병합 때의 이완용 재산은 이른바 은사금(恩賜金)과 하사금, 뇌물, 횡령 등을 합쳐 100만 원(200억 원)이었는데, 이를 굴려서 15년 사이에 3배로 늘렸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팔아먹은 댓가로 받은 돈은 15만 원(30억 원)이라고 했다.
자신의 안위만을 일삼아온 대표적 토착왜구 매국노가 과연 조국독립을 입에 담을수 있는가?
**친일매국노 옹호와 반민특위해산의 당사자 이승만<노덕술,김창용,백선엽등 등용>
해동사는 지난 1955년 장흥읍에 살았던 유림 안홍천(죽산 안씨)이 순흥(順興) 안씨인 안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이승만(李承晩)에게 건의해 죽산 안씨 문중에서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해동사의 현판인 `해동명월(海東明月)`은 이승만의 친필이다. 반민특위 강제해산과 친일청산을 포기한 이승만의 화장술이 여기에도
자리한다.이승만의 만행은 다음과 같다. 국민보도연맹사건,한강다리폭파 줄행랑,제주4.3,여순사건,국민방위군사건,3.15부정선거,김구선생암살배후,독립운동자금횡령등 날밤이 지나도 열거할수 없을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전체국민의 0.5%에 달하는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학살하였다. 10만 명이면 5·18 광주항쟁 유족규모의 50배에 달하는 규모로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학살의 집약성으로 본다면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능가하며 그 광기로 본다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비할 수 있다. 이토를 처단한 안의사 사당에 매국노들을 등용해서 부정한 권력을 연장하고 자국민을 학살한 이승만의 친필이 자리하고 있음은 왜곡된 우리역사의 한단면으로 장흥군에서도 深思熟考하여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후손들의 책무임을 강조해 본다.
*3월24일 경남 밀양 의열단 김원봉장군 기념관과 진주성을 마눌님,아들과 함께 다녀왔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해서 김구선생보다 한참 많은 최고액현상금을 걸었던 김원봉장군이 남북모두로 부터 잊혀지고 인정 받지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하루빨리 재평가로 그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최고영예의 서훈도 받아야 할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역사기행에서 김시민장군도 충무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이순신장군만 충무공인지 알았던 無知에서 벗어날수있는 기회였다.
비문에는 1000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여명으로 2만 명의 적을 격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3대첩<행주권율,한산이순신 ,진주김시민>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 똑같이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받고 임진왜란 3대첩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보다 덜 알려진 김시민장군, 우리들이 잊지말고 꼭 기억해야할 구국의 영웅이다.지금 이시각 자유를 누리고 우리들이 존재함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왜구들은 부끄런 줄 모르고 오늘도 메뚜기처럼 날뛰는 현실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민원업무처리
- 접수처리 중 : 군수실 비서실 (문의 : 061-860-5506)
- 접수처리 중 : 군수실 비서실 (문의 : 061-860-5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