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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망하면 누가 다시 하겠는가?
- 작성일
- 2019.02.22 19:54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955
임란이후 세도정치와 3정의 문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져 민란이100차례 일어나고 1894년에는 동학전쟁까지 발발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세의존적이던 고종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름의 노력을 해봤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하고 말았다.20세기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성격이 자유경쟁단계의 산업자본에서 독점·금융자본화함으로써 '제국주의'는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개싸움을 벌인 대립과 분쟁이었다.제국주의의 어원이 된 임페리움은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의 법에 의한 명령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와 수탈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고종 독살설 확산으로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국외에서는 신한 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고(중국 상하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한 독립 선언서 발표(만주), 2·8 독립 선언을 발표(일본 도쿄)해서 그야말로 거족적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이 나타났다 .
3.1만세투쟁의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1919.3.1ㅡ5.30>에는 전국230군과 부에서 200만여명이 참가했고,1500회의 만세투쟁,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16000명 부상,체포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고 구속자는 16000명이었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운동임과 동시에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중동,필리핀,베트남의 민족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민중의 독립열기를 모으기 위한 구심점으로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11), 대한국민의회정부(1919. 3. 17,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 4. 1, 서울), 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9,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 4. 17,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 4. 23, 서울·인천), 그리고 동삼성(東三省:만주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 지역 이상에서 임시정부가 준비되었다.
이 가운데 상하이임정<신한청년당주도>·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전러한족중앙총회>·서울의 한성정부<13도 대표주도>가 헌법·의회·서고문(誓告文)·정강·강령 등을 갖춘 이 3개의 실질적인 정부는 상하이에 집결, 1919년 9월 15일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45년까지 조국광복및 민족해방투쟁을 펼쳐나갔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金九)선생 등이 귀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인 임시정부.2019년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의 역사와 뿌리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 아니라,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며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공로가 뿌리채 뽑히는 일이 박근혜,이명박강도정권에서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될 역사의 반역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현재 서금이로)에서 수립되었다. 하지만 고난의 연속을 대변하듯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중국 대륙을 옮겨다니며 피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7년간의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상하이(上海) : 1919. 3 - 1932. 5
쟈싱(嘉興) ·항저우(杭州) : 1932. 5 - 1935. 10(11)
전쟝(鎭江) ·난징(南京) : 1935. 10 - 1936. 2
우한(武漢) : 1936. 2 - 1937. 11(?)
창사(長沙) : 1938. 3 - 1938. 7
꽝저우(廣州) : 1938. 7 - 1938.
푸산(佛山)
류조우(柳州) ]
꾸이양(貴陽)
치쟝 : 1939. 3 - 1940. 9
충칭(重慶) : 1940. 9 - 1945. 11
대한민국임정주석 김구선생의 호는 白凡이다.백범의 뜻은 백정과 범부를 말한다. 양반과 왕족의 나라가 아니라 백정과 범부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나라,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을 만들기 위해 임정헌법은 이를 못박았고 27년을 풍찬노숙하면서 임정을 이끌어 온것이다.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중 유일무이한 저항의 기록이다.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독립투쟁했던 3대가 망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70%가 200만원미만 소득자로 살아가는데 반해 친일매국노 후손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상위1%의 안락한 삶을 누리고있다.이런 웃픈 현실이 다시 반민특위를 작동해야하는 當爲이며 시대정신이다.
김구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자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백범일지중에서>
분단이 아닌 통일된 나라, 복지의 나라가 김구선생을 비롯한 이름없이 산화해 간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던지며 꿈꾸었던 나라였다 .우리모두는 과연 먼저가신 민족독립선열들의 뜻과 바램을 실천해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촛불革命으로 진정한 民主政府를 갖게된 우리들은 이제 "선열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조국의 민주 自主 平和 統一을 위해 각자가 선 자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3.1만세투쟁 10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進步하기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지금 대한민국은 통일과 평화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 하고 있다.
더 늦어지면 그 의미도 퇴색되고, 더 힘든 상황을 겪게되며, 그간의 노력과 고생이 빛이 바랜다.분단상태로는 미래도 없고 成長動力도없다.남북은 서로 겨누는 총을 내리고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서 평화공존의 길로 손잡고 나아가 민족분단을 종식시켜야 한다.
분단고착화와 반공이데올로기만을 밑천삼아 야만정권을 유지해왔던 반통일세력을 탄핵하고 탄생한 너무나 고귀한 문재인 정부이다.온갖 공을 들여 시작한 한반도 비핵화 프로젝트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인류 미래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담았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한다.북미하노이회담이 멀지 않았다.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기초한 바로 '평화공존'이다. 남북한반도를 넘어 전세계지구촌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 '평화의 길'을 만들어서 전쟁공포가 사라진 평화의 대한민국을 우리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을 기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행동에 나설때 이다.이제 머지 않아 다가올 통일한국은 동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지구촌 5대강국으로 우뚝설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단일민족 국가로 존재한 역사가 매우 짧다.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 1871년의 일이다. 반면 한국은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다. 그렇기에 분단의 시기가 독일보다 길지만 통일은 더 수월하다고 본다.우리는 원래 하나가 아니었던가. 같은말과 글을 쓴다는 것은 이질감및 거리감을 좁히는 수단으로서 최상의 효용가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빌리브란트가 '원래 하나였던 것은 다시 하나가 돼야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 정확히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장흥군도 통일시대를 대비해서라도 하루빨리 안중근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와의 자매결연을 통일부에 요청해서 民族魂을 계승하는 지방정부의 역할을 해나가야 할것이다.전쟁범죄국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은 요원하고 분단 현실까지 겹친걸보시며 구천을 떠돌고 계실 안중근의사님께 義鄕長興이 실천해야 할 시대적 사명 아닐까 한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은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와 수탈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고종 독살설 확산으로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국외에서는 신한 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고(중국 상하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한 독립 선언서 발표(만주), 2·8 독립 선언을 발표(일본 도쿄)해서 그야말로 거족적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이 나타났다 .
3.1만세투쟁의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1919.3.1ㅡ5.30>에는 전국230군과 부에서 200만여명이 참가했고,1500회의 만세투쟁,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16000명 부상,체포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고 구속자는 16000명이었다.
3·1 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운동임과 동시에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중동,필리핀,베트남의 민족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민중의 독립열기를 모으기 위한 구심점으로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11), 대한국민의회정부(1919. 3. 17, 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1919. 4. 1, 서울), 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9, 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1919. 4. 17, 평안도), 한성임시정부(1919. 4. 23, 서울·인천), 그리고 동삼성(東三省:만주일대)의 고려임시공화국 등 6개 지역 이상에서 임시정부가 준비되었다.
이 가운데 상하이임정<신한청년당주도>·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전러한족중앙총회>·서울의 한성정부<13도 대표주도>가 헌법·의회·서고문(誓告文)·정강·강령 등을 갖춘 이 3개의 실질적인 정부는 상하이에 집결, 1919년 9월 15일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45년까지 조국광복및 민족해방투쟁을 펼쳐나갔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金九)선생 등이 귀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인 임시정부.2019년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의 역사와 뿌리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 아니라,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며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공로가 뿌리채 뽑히는 일이 박근혜,이명박강도정권에서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더이상 용납해서는 안될 역사의 반역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현재 서금이로)에서 수립되었다. 하지만 고난의 연속을 대변하듯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중국 대륙을 옮겨다니며 피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7년간의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상하이(上海) : 1919. 3 - 1932. 5
쟈싱(嘉興) ·항저우(杭州) : 1932. 5 - 1935. 10(11)
전쟝(鎭江) ·난징(南京) : 1935. 10 - 1936. 2
우한(武漢) : 1936. 2 - 1937. 11(?)
창사(長沙) : 1938. 3 - 1938. 7
꽝저우(廣州) : 1938. 7 - 1938.
푸산(佛山)
류조우(柳州) ]
꾸이양(貴陽)
치쟝 : 1939. 3 - 1940. 9
충칭(重慶) : 1940. 9 - 1945. 11
대한민국임정주석 김구선생의 호는 白凡이다.백범의 뜻은 백정과 범부를 말한다. 양반과 왕족의 나라가 아니라 백정과 범부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나라,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을 만들기 위해 임정헌법은 이를 못박았고 27년을 풍찬노숙하면서 임정을 이끌어 온것이다.식민지배를 받은 나라중 유일무이한 저항의 기록이다.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독립투쟁했던 3대가 망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70%가 200만원미만 소득자로 살아가는데 반해 친일매국노 후손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상위1%의 안락한 삶을 누리고있다.이런 웃픈 현실이 다시 반민특위를 작동해야하는 當爲이며 시대정신이다.
김구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자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백범일지중에서>
분단이 아닌 통일된 나라, 복지의 나라가 김구선생을 비롯한 이름없이 산화해 간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던지며 꿈꾸었던 나라였다 .우리모두는 과연 먼저가신 민족독립선열들의 뜻과 바램을 실천해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촛불革命으로 진정한 民主政府를 갖게된 우리들은 이제 "선열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조국의 민주 自主 平和 統一을 위해 각자가 선 자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3.1만세투쟁 10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進步하기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지금 대한민국은 통일과 평화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 하고 있다.
더 늦어지면 그 의미도 퇴색되고, 더 힘든 상황을 겪게되며, 그간의 노력과 고생이 빛이 바랜다.분단상태로는 미래도 없고 成長動力도없다.남북은 서로 겨누는 총을 내리고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서 평화공존의 길로 손잡고 나아가 민족분단을 종식시켜야 한다.
분단고착화와 반공이데올로기만을 밑천삼아 야만정권을 유지해왔던 반통일세력을 탄핵하고 탄생한 너무나 고귀한 문재인 정부이다.온갖 공을 들여 시작한 한반도 비핵화 프로젝트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인류 미래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담았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한다.북미하노이회담이 멀지 않았다.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기초한 바로 '평화공존'이다. 남북한반도를 넘어 전세계지구촌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 '평화의 길'을 만들어서 전쟁공포가 사라진 평화의 대한민국을 우리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을 기억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행동에 나설때 이다.이제 머지 않아 다가올 통일한국은 동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지구촌 5대강국으로 우뚝설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단일민족 국가로 존재한 역사가 매우 짧다.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 1871년의 일이다. 반면 한국은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다. 그렇기에 분단의 시기가 독일보다 길지만 통일은 더 수월하다고 본다.우리는 원래 하나가 아니었던가. 같은말과 글을 쓴다는 것은 이질감및 거리감을 좁히는 수단으로서 최상의 효용가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빌리브란트가 '원래 하나였던 것은 다시 하나가 돼야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 정확히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장흥군도 통일시대를 대비해서라도 하루빨리 안중근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와의 자매결연을 통일부에 요청해서 民族魂을 계승하는 지방정부의 역할을 해나가야 할것이다.전쟁범죄국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은 요원하고 분단 현실까지 겹친걸보시며 구천을 떠돌고 계실 안중근의사님께 義鄕長興이 실천해야 할 시대적 사명 아닐까 한다.
부산면 꽃동네에서 반민특위 안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