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보조 존재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전남의 실학(實學)을 말할 때 흔히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생각하나, 그는 전남인이 아니고 다만 전남에서 실학을 완숙시켰던 사람이다.
진정한 전남인을 손꼽으면서 우리 장흥의 존재선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존재선생은 다산보다 25년 앞서 실학자로서 학문의 기틀을 세워 실행한 분으로 실학의 효시를 이루었다.
호는 존재(存齋)이고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1754년(영조 30)에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세때 글을 해독하고 9세때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경학(經學)에 심형을 쏟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필요없다고 하여 천문.지리.율력.복서.병도.산수로부터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25세때 이미 거유(巨儒)로 이름을 높았으며 1764년(영조40) 38세때 동양삼국 및 세계지도와 지지(地誌)를 기술한 『환영지』와 『고금서(古琴書)』,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의 개역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政弦新譜)』를 지었다. 다음해 생원복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기 않고 후진육성에 전력하는 한편『사성록(思成錄)』『자회가(自悔哥)』『경서조대(經書條對)』『독사차록(讀史箚錄)』등 1백여권에 가까운 저술을 하였다.
1974(정조18)68세때 호남지방의 해일로 위유사 서영보(慰諭使 徐榮輔)가 내려와 공이 저술한 여러 책들을 보고 임금께 등용할 것을 소청하게 되는 다음해 부사용(副司勇)의 군직을 내림과 함께 도백(道佰)으로 하여금 그 저서를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던 차 1796(정조29) 또다시 선공감 부봉사(線工監 副奉事)를 내렸지만 또한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봄 여러 차례 소명을 받고 입궐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한 만언 상소문을 바치고 노환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되어 선정을 펴다 179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